개신교라는 말은, 1517년의 종교 개혁 사이에 태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개신교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당시 마르틴 루서는 95개 반박 조항을 교회 문에 달아 교회 개혁을 주장하다 1520년 천주교, 1521년 제국 평의회에 의해 추방됐습니다. 그런데도, 가톨릭 교회뿐만이 아니라, 루터와 루터의 지지자도 일시적인 분열을 기대하고 있었으므로, 수년 후도 실용적인 개신교 교회의 설립은 계속되었습니다. 루터와 츠빙그리,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던 지지자들은 가톨릭 교회의 전통에 대해 성경의 의문을 제기하며 성경을 교회 전통보다 우선시하고 전통보다 복음주의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로마 교회의 전통으로 탈바꿈한 초기 기독교의 부활에 진정한 신념을 가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종교개혁의 입장에 있는 루터와 루터 지지자들은 1520년 가톨릭 교회와 황제의 이단 판결에 반대하여 가톨릭 교회에서 파문되었고, 1521년 웜 사건 당시 400명의 제국 구성원 대다수를 세속적으로 무시하였지만 카를 5세는 최초의 슈투르크에서 제국 축출을 발령하였습니다.전쟁이 종결되고 강화되자 이전의 결정은 번복되고 루터파가 다시 밀어붙여 개신교 황후와 제국 도시들은 이 결정에 항의했습니다. 루터 왕조의 제후나 제국의 도시는 루터 왕조나 루터 왕조에 내려진 강제 퇴거 명령은 정당한 절차에 따라 기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효이며, 이후의 조치도 당연히 무효라고 항의했습니다.
이들은 또 이들이 진정한 신앙을 갖고 있으며 결코 이단이 아닌 기독교인이며 황제에 대해 세속적인 충성심을 갖고 있습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1529년 제2차 첨탑제국 회의 직후 루터파 교회는 루터파 선언에 해당하는 '아우구스타나 고백'을 제출하고 기존 교회와 교인들에게 공존을 요구했지만 황제와 천주교 세력은 거부당했고, 교회 분열은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한편 14세기 중반 잉글랜드에도 개신교와 같은 가톨릭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이 존재했고, 존 위클리프와 신봉자들은 가톨릭교회에서 로라디라고 불렸습니다. 롤라드는 성경을 기억하기 위해 그들을 미치광이로 취급하는 경멸적인 말이었습니다 1517년 이후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제창한 루터파를 가리키는 루터파라는 말도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루터파 또는 루터 신봉자라고 불렸습니다 '개신교'라는 말은 약간의 속임수입니다 오히려 루터파 그룹은 기존 가톨릭 교회를 기독교인이 아닌 로마의 신봉자이자 교황 주의자라고 비난했습니다. 현재의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16세기부터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와 교황의 지휘권을 부정하고, 제2경을 장면으로 인정하지 않는 종파를 총칭하여 개신교라고 부릅니다." 게다가 개신교로부터 분열된 종파는 개신교라고도 불립니다.
마지막으로 개혁자들이 로마교회의 미신적 악으로 간주하는 요소를 극복하고 성경에 충실한 '바른 교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개신교의 정체성이 16세기경에 생겨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개신교는 '성경만'을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교회 조직과 성경 전통을 대등한 입장에 두고 있는 가톨릭과 동방교회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같은 개신교 내에서도 전통에 대한 견해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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